토요일 밤의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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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요일 밤의 학살은 1973년 10월 20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 특별 검사 아치볼드 콕스를 해임하기 위해 법무장관 엘리엇 리처드슨과 법무차관 윌리엄 러클샤우스를 해임시킨 사건을 말한다. 닉슨은 콕스가 닉슨 백악관 녹음테이프 제출을 요구하자 행정 특권을 주장하며 거부했고, 법원의 소환장 인용에도 불응했다. 닉슨은 콕스 해임을 거부하는 리처드슨을 해임하고, 이어서 러클샤우스를 해임한 뒤, 로버트 보크 법무차관 대행에게 콕스 해임을 명령했다. 이 사건으로 닉슨은 국민과 언론의 비난을 받았고, 탄핵 위기에 직면하여 결국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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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밤의 학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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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사건명 | 토요일 밤의 학살 |
관련 사건 | 워터게이트 스캔들 |
발생 날짜 | 1973년 10월 20일 |
주요 인물 | |
당시 대통령 | 리처드 닉슨 |
법무 장관 | 엘리엇 리처드슨 |
법무 차관 | 윌리엄 D. 러켈스하우스 |
특별 검사 | 아치볼드 콕스 |
법무부 차관보 | 로버트 보크 |
사건 전개 | |
발단 | 닉슨 대통령이 아치볼드 콕스 특별 검사에게 워터게이트 테이프 제출을 거부 |
법무 장관 사임 | 엘리엇 리처드슨이 콕스 해고 명령에 반발하여 사임 |
법무 차관 해고 | 윌리엄 D. 러켈스하우스가 콕스 해고 명령에 불복하여 해고 |
특별 검사 해고 | 로버트 보크가 콕스를 해고 (법무부 차관보 권한대행 자격) |
후임 특별 검사 임명 | 레온 자워스키가 후임 특별 검사로 임명 |
기타 | |
관련 인물들의 사임 및 해고 | 엘리엇 리처드슨 (법무장관 사임) 윌리엄 D. 러켈스하우스 (법무차관 해고) 아치볼드 콕스 (특별검사 해고) |
로버트 보크 | 닉슨 대통령으로부터 대법원 판사 제안을 받았음. |
사건 영향 | 닉슨 대통령 탄핵 논의를 가속화시킴. |
2. 명칭의 유래
해당 표현의 정확한 기원은 알려져 있지 않다. 최초로 기록된 것은 사건 발생 이틀 후인 10월 22일 데이비드 S. 브로더(David S. Broder)가 쓴 ''워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 기사에 등장하지만, 그 기사에서조차 브로더는 이미 그 사건을 "토요일 밤의 학살"이라고 부르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2017년 ''워싱턴 포스트'' 기사에서 에이미 B. 왕(Amy B. Wang)은 샐리 퀸(Sally Quinn)의 회상을 바탕으로 이 표현을 풍자 작가 아트 부흐왈드(Art Buchwald)에게 돌렸다.[7]
1973년 5월, 아치볼드 콕스(Archibald Cox)는 워터게이트 호텔 침입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특별 검사로 임명되었다.[8] 엘리엇 리처드슨(Elliot Richardson) 법무장관은 미국 하원 사법위원회에 특별 검사 임명을 약속한 후 콕스를 임명했으며, 이 직책은 법무부 내 종신직으로 설정되어 법무장관의 권한 하에 있었다. 리처드슨은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 정당한 사유 없이는 워터게이트 특별 검사를 해임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8]
3. 역사적 배경
1973년 5월, 엘리엇 리처드슨 미국 법무장관은 1972년 6월 17일 워싱턴 D.C.의 워터게이트 호텔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 침입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아치볼드 콕스를 특별 검사로 임명했다. 이는 미국 하원 사법위원회에 특별 검사를 임명하겠다고 약속한 데 따른 것이었다.[8] 이 직책은 법무부 내 종신직으로, 법무장관은 "정당한 사유"(예: 중대한 부적절 행위 또는 직무상의 위법 행위)가 없는 한 특별 검사를 해임할 수 없었다. 리처드슨은 미국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 정당한 사유가 없는 한 워터게이트 특별 검사를 해임하는 권한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8]
콕스가 녹음된 대화 내용 사본을 요구하며 소환장을 발부하자, 닉슨 대통령은 이를 거부했다. 1973년 10월 12일, 워싱턴 D.C. 순회 항소법원(United States Court of Appeals for the District of Columbia Circuit)은 닉슨의 행정 특권 주장을 기각하고 소환장을 인용했다.[9] 10월 19일 금요일, 닉슨은 스테니스 타협안(Stennis Compromise)으로 알려진 제안을 했다. 청각 장애가 심했던 존 C. 스테니스 상원의원에게 테이프를 검토하고 특별 검사실에 요약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콕스는 같은 저녁에 이 타협안을 거부했고, 주말 동안 정부 기관이 문을 닫는 동안 법적 공방에 짧은 휴지 기간이 있을 것이라고 여겨졌다.[8]
그러나 다음 날(토요일), 닉슨은 법무장관 리처드슨에게 콕스를 해임하라고 명령했다. 리처드슨은 거부하고 항의하며 사임했다. 그러자 닉슨은 윌리엄 러클샤우스 법무차관에게 콕스를 해임하라고 명령했다. 러클샤우스도 거부하고 사임했다.[8]
닉슨은 로버트 보크(Robert Bork) 미국 법무총장(Solicitor General of the United States)에게 법무부 장관 대행으로서 콕스를 해임하라고 명령했다. 리처드슨과 러클샤우스는 모두 의회 감독위원회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개인적으로 보장했지만, 보크는 그렇지 않았다. 보크는 나중에 닉슨의 명령이 유효하고 적절하다고 믿었다고 주장했지만, 여전히 "직장을 유지하기 위해 대통령의 심부름을 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사임하는 것을 고려했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무진을 타고 백악관으로 와서 법무장관 대행으로 취임한 보크는 콕스를 해임하는 서한을 작성했다.[10][11]
4. 사건의 전개
스테니스 타협안(Stennis Compromise)을 거부당한 닉슨은 1973년 10월 20일(토), 연방 정부 기관이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콕스 해임을 은밀히 추진했다. 먼저 리처드슨 법무장관에게 콕스 해임을 요구했지만, 리처드슨은 이를 거부하고 항의하며 사임했다. 닉슨은 윌리엄 러클샤우스(William Ruckelshaus) 법무차관에게 같은 요구를 했지만, 그 역시 거부하고 사임했다.[8]
닉슨은 로버트 보크(Robert Bork) 법무장관 대행에게 콕스 해임을 명령했다. 리처드슨과 러클샤우스는 의회 감독위원회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개인적으로 보장했지만, 보크는 그러지 않았다. 보크는 닉슨의 명령이 유효하고 적절하다고 믿었지만, "직장을 유지하기 위해 대통령의 심부름을 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사임하는 것을 고려했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크는 콕스를 해임하는 서한을 작성했다.[10][11]
그 후 닉슨은 FBI를 동원하여 특별검사, 법무장관, 법무차관의 집무실을 봉쇄하고 사건 서류를 압수했으며, 특별 연방 검찰청을 폐지하고 사건 조사 권한을 법무부로 이관한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닉슨은 국민과 언론의 격렬한 비난을 받았고, 연방 의회는 닉슨의 행위를 대통령 권력 남용으로 비난하며 다수의 탄핵 법안을 제출했다. 이 기간에 존 C. 스테니스(John C. Stennis) 상원의원이 워싱턴 D.C. 자택에서 총격을 받고 중상을 입는 사건도 발생했다.
4. 1. 스테니스 타협안과 콕스의 거부
1973년 10월 19일 금요일, 닉슨 대통령은 스테니스 타협안(Stennis Compromise)으로 알려진 제안을 했다. 이는 청각 장애가 심했던 미시시피 주 상원의원 존 C. 스테니스(John C. Stennis)에게 녹음 테이프를 검토하고 특별 검사실에 요약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콕스는 같은 저녁에 이 타협안을 거부했다. 주말 동안 정부 기관이 문을 닫는 동안 법적 공방에 짧은 휴지 기간이 있을 것이라고 여겨졌다.[8]
콕스가 닉슨에게 소환장을 발부하여 녹음된 대화 내용 사본을 요구했을 때, 대통령은 이를 거부했다. 1973년 10월 12일, 워싱턴 D.C. 순회 항소법원(United States Court of Appeals for the District of Columbia Circuit)은 닉슨의 행정 특권 주장을 기각하고 소환장을 인용했다.[9]
워터게이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닉슨 대통령이 설치하고, 1973년 6월 17일 리처드슨 법무장관이 임명한 콕스 특별검사는 7월 16일 상원 특별조사위원회에서 대통령 집무실에서 이루어진 대화를 비밀리에 녹음한 테이프의 존재가 드러나자, 7월 18일 사건 증거로서 대통령 집무실에서 이루어진 대화 녹음 테이프 8개의 제출을 요구했다.
그러나 백악관은 테이프 제출을 거부했기 때문에, 특별검사는 7월 23일 연방지방법원에 제소했고, 8월 29일 워싱턴 연방지방법원의 시리카 판사는 특별검사의 소송을 인정하여 대통령에게 테이프 제출을 명령했으며, 닉슨은 대통령 특권을 내세워 이를 거부했지만 10월 12일 연방고등법원 항소심에서도 시리카 판사의 결정을 지지했다. 이 때문에 연방대법원에 상고할 선택지도 있었지만, 상고하지 않고 10월 19일 녹음 테이프에 대해 닉슨이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의원 중 한 명이자 야당인 민주당의 거물인 존 C. 스테니스(John C. Stennis) 상원 의원이 청취하여 그 조사 보고를 하고, 그 위에 특별검사에게 제출한다는 조건으로 제출 명령을 취소하도록 콕스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같은 날 밤, 콕스는 기록된 조사 보고서가 테이프 내용 전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이 타협안을 거부했다.
다음 날인 10월 20일(토) 기자회견에서 콕스는 녹음 테이프 제출을 계속 요구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4. 2. 콕스 해임과 법무부 장·차관의 연쇄 사임
1973년 5월, 아치볼드 콕스(Archibald Cox)는 워터게이트 호텔 침입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특별 검사로 임명되었다.[8] 콕스가 녹음된 대화 내용 사본을 요구하는 소환장을 발부하자, 닉슨 대통령은 행정 특권을 주장하며 거부했다. 워싱턴 D.C. 순회 항소법원(United States Court of Appeals for the District of Columbia Circuit)은 닉슨의 주장을 기각하고 소환장을 인용했다.[9]
1973년 10월 19일, 닉슨은 존 C. 스테니스(John C. Stennis) 상원의원에게 테이프를 검토하고 요약해 줄 것을 요청하는, 이른바 스테니스 타협안(Stennis Compromise)을 제안했으나, 콕스는 이 타협안을 거부했다.[8]
다음 날인 10월 20일(토요일), 닉슨은 법무장관 엘리엇 리처드슨(Elliot Richardson)에게 콕스를 해임하라고 명령했다. 리처드슨은 이를 거부하고 항의하며 사임했다. 닉슨은 법무차관 윌리엄 러클샤우스(William Ruckelshaus)에게 콕스 해임을 명령했지만, 러클샤우스 역시 거부하고 사임했다.[8]
결국 닉슨은 법무총장(Solicitor General of the United States) 로버트 보크(Robert Bork)에게 법무부 장관 대행으로서 콕스를 해임하라고 명령했다. 보크는 닉슨의 명령이 유효하다고 믿었지만, 사임을 고려하기도 했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크는 콕스를 해임하는 서한을 작성했다.[10][11]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을 은폐하려 한다는 의혹을 더욱 증폭시켰다. 닉슨은 FBI를 동원하여 특별검사, 법무장관, 법무차관의 집무실을 봉쇄하고 사건 서류를 압수했으며, 특별 연방 검찰청을 폐지하고 사건 조사 권한을 법무부로 이관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경찰 국가의 재림", "범죄 용의자가 권력으로 사건을 무마하고 있다"는 국민들의 비판을 불러왔고, 백악관에는 수만 통의 항의 전보와 전화가 쇄도했다.
결국 닉슨은 10월 23일 법원의 명령에 따라 녹음 테이프를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11월 17일 기자회견에서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I am not a crook.영어)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결백을 강조했다.
4. 3. 닉슨의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 발언
닉슨은 10월 23일 시리카 판사의 녹음 테이프 제출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11월 17일, 닉슨은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행위를 다음과 같이 변명했다.
5. 사건의 여파
"토요일 밤의 학살"은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아치볼드 콕스 특별검사 해임과 법무부 장관 및 차관의 사임은 닉슨 대통령이 사법부와 입법부를 무시한 행위로 여겨져 법적, 도덕적 권위를 잃게 만들었다.[14][15][16]
많은 미국인들은 이 사건을 통해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에 깊이 연루되었으며, 녹음 테이프에 그에게 불리한 내용이 담겨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13]
5. 1. 닉슨 탄핵 여론 확산
초기에는 닉슨 백악관이 러켈샤우스를 해고했다고 주장했지만, 다음 날 워싱턴 포스트가 발표한 기사에서 "대통령이 보크에게 보낸 편지에는 러켈샤우스가 사임했다고도 적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닉슨의 거짓말이 밝혀졌다.[12]해고된 날 밤, 콕스의 부검사와 언론 담당자들은 열정적인 기자회견을 열고 그가 작성한 다음 성명서를 발표했다. "우리가 계속해서 사람이 아닌 법에 의한 정부가 될 것인지 아닌지는 이제 의회와 궁극적으로 미국 국민이 결정할 문제입니다."[13]
1973년 11월 14일, 게르하르트 게셀 연방 지방 법원 판사는 특별 검사실 설립 규정에 명시된 특별한 부적절성이 발견되지 않은 한 콕스의 해고는 불법이라고 판결했다.[10][6] 의회와 많은 미국인들은 대통령 권력의 심각한 남용으로 간주하여 격분했고, 백악관과 의회에 항의하는 전보를 이례적으로 많이 보냈다.[14][15][16]
토요일 밤의 대학살 이후 1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NBC 뉴스를 위한 올리버 퀘일 여론조사에 따르면, 처음으로 미국 시민의 다수가 닉슨의 탄핵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찬성 44%, 반대 43%, 결정하지 않음 13%였으며, 표본오차는 2~3%였다.[17] 그 후 며칠 동안 의회에서는 대통령에 대한 탄핵 결의안이 여러 건 제출되었고, 리처드 닉슨에 대한 탄핵 절차가 시작되었다.
"토요일 밤의 학살"이 일으킨 파장은 컸고, 행정부 수반이 사법부와 입법부를 무시했다는 점에서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대통령은 권위를 상실했다. 또한 많은 국민들은 사태의 경과로 판단하여 녹음 테이프에는 닉슨에게 불리한 대화가 상당히 있으며, 워터게이트 사건과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 스파이로 애그뉴(미국 부통령)가 주지사 시절 뇌물 수수 혐의로 부통령직에서 사퇴하고, 10월 12일 당시 하원 원내총무였던 제럴드 포드가 닉슨으로부터 부통령 지명을 받은 상태였다. 이후 포드가 의회의 승인을 얻어 후임으로 공식적으로 부통령에 취임한 후, 닉슨 대통령의 탄핵 움직임이 가속화되었다.
5. 2. 닉슨의 사임
초기에는 닉슨 백악관이 러켈샤우스를 해고했다고 주장했지만, 다음 날 워싱턴 포스트가 발표한 기사에서 "대통령이 보크에게 보낸 편지에는 러켈샤우스가 사임했다고도 적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닉슨의 거짓말이 밝혀졌다.[12]1973년 11월 14일, 게르하르트 게셀 연방 지방 법원 판사는 특별 검사실 설립 규정에 명시된 특별한 부적절성이 발견되지 않은 한 콕스의 해고는 불법이라고 판결했다.[10][6] 의회와 많은 미국인들은 대통령 권력의 심각한 남용으로 간주하여 격분했고, 백악관과 의회에 항의하는 전보를 이례적으로 많이 보냈다.[14][15][16]
토요일 밤의 대학살 이후 1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NBC 뉴스를 위한 올리버 퀘일 여론조사에 따르면, 처음으로 미국 시민의 다수가 닉슨의 탄핵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찬성 44%, 반대 43%, 결정하지 않음 13%였으며, 표본오차는 2~3%였다.[17] 그 후 며칠 동안 의회에서는 대통령에 대한 탄핵 결의안이 여러 건 제출되었고, 리처드 닉슨에 대한 탄핵 절차가 시작되었다.
하원 사법위원회는 토요일 밤의 대학살 이후 9개월 이상이 지난 1974년 7월 27일에야 닉슨을 직권남용으로 기소하면서 첫 번째 탄핵 조항을 승인했다. 이후 두 개의 탄핵 조항이 더 추가되었다. 닉슨은 2주일 이내에 사임을 결정했고, 사임 의사를 발표하는 텔레비전 연설 후 1974년 8월 9일에 사임했다.
"토요일 밤의 학살"이 일으킨 파장은 컸다. 행정부 수반이 사법부와 입법부를 무시했다는 점에서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대통령은 권위를 상실했다. 또한 많은 국민들은 사태의 경과로 판단하여 녹음 테이프에는 닉슨에게 불리한 대화가 상당히 있으며, 워터게이트 사건과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때 스파이로 애그뉴 (미국 부통령)가 주지사 시절 뇌물 수수 혐의로 부통령직에서 사퇴하고, 10월 12일 당시 하원 원내총무였던 제럴드 포드가 닉슨으로부터 부통령 지명을 받은 상태였다. 이후 포드가 의회의 승인을 얻어 후임으로 공식적으로 부통령에 취임한 후, 닉슨 대통령의 탄핵 움직임이 가속화되었다.
6. 사건의 영향 및 유산
닉슨은 녹음테이프 제출을 계속 거부했지만, 국가 안보 관련 내용을 편집해야 한다는 이유로 녹취록 공개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11월 7일, 한 테이프에서 18분 30초 분량이 삭제된 사실이 발견되어 논란이 커졌다. 닉슨의 비서 로즈 메리 우즈(Rose Mary Woods)는 실수로 지웠다고 주장했지만, 법의학 분석 결과 최소 5번, 최대 9번까지 여러 부분으로 지워진 것으로 밝혀졌다.[23]
워터게이트 사건과 은폐 압력으로 닉슨 대통령직은 몰락했고, 탄핵 및 유죄 판결이 거의 확실해지자 닉슨은 사임했다.
보크는 회고록에서 닉슨이 콕스 해임에 대한 자신의 역할 이후 대법원 자리를 약속했다고 밝혔다. 닉슨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지만,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은 1987년 로버트 보크 대법원 임명(Robert Bork Supreme Court nomination)을 통해 보크를 대법원에 지명했으나 상원에서 실패했다.[24]
6. 1. 독립검사 제도 도입과 폐지
닉슨은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 보크가 새로운 특별 검사를 임명하도록 허용했고, 보크는 닉슨의 승인을 받아 리온 자워스키(Leon Jaworski)를 특별검사로 선택했다.[18][19][20] 자워스키는 콕스의 수사를 이어받아 백악관과 관련된 광범위한 부패를 조사했다.[22]1978년에는 정부 윤리법(Ethics in Government Act)이 통과·제정되었다.[25] 이는 "토요일 밤의 학살"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법으로, 워싱턴 D.C. 순회구 연방순회구 항소법원이 독립검찰관을 임명하는 독립기관 설치를 규정했다.
이 법에 따라 빌 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백워터 스캔들 수사에서는 재닛 레노 법무장관에 의해 켄 스타가 특별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스타의 수사가 과도하다는 비판과 함께 정쟁의 도구로 이용된다는 비판이 일면서 1999년에 폐지되었다.
이후 법무부는 특별한 상황에서 개인의 이해가 상충되는 문제가 발생할 경우, 해당 문제 또는 관련 인물을 수사하는 것이 공익에 이롭다고 판단될 때 법무장관(또는 장관 대리)이 특별검사를 지명할 수 있는 규정을 연방규칙집에 마련했다.[26][27]
6. 2. 법치주의와 권력 견제의 중요성 재확인
닉슨은 정치적 압력을 느껴 보크가 새로운 특별 검사를 임명하도록 허용했고, 닉슨의 승인을 받은 보크는 리온 자워스키(Leon Jaworski)를 선택했다.[18][19][20] 자워스키가 수사 대상을 워터게이트 사건의 침입 사건으로 제한할지, 아니면 콕스의 선례를 따라 "백악관 배관공(White House Plumbers)"과 관련된 부패 행위와 같은 다른 부패 행위까지 조사할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21] 콕스의 수사를 계속 이어받은 자워스키는 백악관과 관련된 광범위한 부패를 조사했다.[22]닉슨은 계속해서 녹음테이프를 제출하기를 거부했지만, 다수의 테이프에 대한 녹취록을 공개하는 데 동의했다. 닉슨은 국가 안보와 관련된 어떤 음성 자료라도 테이프에서 편집되어야 하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그렇게 했다고 말했다. 11월 7일, 한 테이프의 18분 30초 분량이 지워진 사실이 발견되면서 논란이 더욱 커졌다. 닉슨의 비서인 로즈 메리 우즈(Rose Mary Woods)는 전화를 받는 동안 테이프 플레이어의 발 페달을 잘못 눌러 실수로 테이프를 지웠다고 말했다. 후속 법의학 분석 결과, 테이프는 최소 5개, 어쩌면 9개까지 여러 부분으로 지워진 것으로 판명되었다.[23]
닉슨 대통령직은 워터게이트 사건과 그 은폐로 인한 압력이 커지면서 몰락했다. 거의 확실시되는 탄핵과 유죄 판결에 직면하여 닉슨은 사임했다.
사후에 출판된 회고록에서 보크는 닉슨이 콕스 해임에 대한 보크의 역할 이후 대법원 다음 자리를 약속했다고 말했다. 닉슨은 그 약속을 이행할 수 없었지만,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은 1987년 로버트 보크 대법원 임명(Robert Bork Supreme Court nomination)을 대법원에 지명했지만, 그의 지명은 상원에서 실패했다.[24]
1978년의 정부 윤리법(Ethics in Government Act)은 토요일 밤의 학살의 직접적인 결과였다.[25]
참조
[1]
웹사이트
What Was the Saturday Night Massacre?
https://www.history.[...]
2020-05-13
[2]
웹사이트
A Brief History Of Nixon's 'Saturday Night Massacre'
https://www.npr.org/[...]
2020-05-13
[3]
뉴스
Bork: Nixon Offered Next High Court Vacancy in '73
https://news.yahoo.c[...]
2013-02-25
[4]
뉴스
Bork Irked by Emphasis on His Role in Watergate
https://www.nytimes.[...]
1987-07-02
[5]
뉴스
Attorney General, Prosecutor Picked
https://new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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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coined 'Saturday Night Massacre'? A birthday party at a YMCA may hold the k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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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Views Emerge Of Bork's Role in Watergate Dismiss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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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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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Nixon Fires Cox; Richardson Qu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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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xon Forces Firing of Cox; Richardson, Ruckelshaus Qu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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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x Office Shut On Nixon's Or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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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Can Cheaply Wire (Cable) The White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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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peachment Mail Floods Cong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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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Poll Shows Many for Impeach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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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xon Names Saxbe Attorney General; Jaworski Appointed Special Prosecu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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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olitical volcano just erupted': is the US on the brink of the next Waterg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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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xon Hoping Jaworski Will Drop Plumber Pro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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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worski: In Cox's footste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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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al Archives Has Given Up on Filling the Nixon Tape G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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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k: Nixon Offered Next High Court Vacancy in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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